12월 3일 "낙태, 불편한 진술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홍일표 의원실에서 주최하는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석했습니다. 저는 ‘생명보호,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원고를 발표했는데, 내용은 진정 생명보호를 위해서는 사회 인프라가 마련되어야지, 불법낙태 단속이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낙태 단속은 결국 낙태를 음성화하여 여성들의 건강을 해치고 심하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결과를 야기할 뿐 결코 대책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낙태할 권리는 출산할 권리, 피임할 권리와 함께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생명보호, 어떻게 해야 할까
이윤상(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생명권
생명권과 다툴 수 있는 권리는 없다. 그 어떤 경우에도 생명이 지켜져야 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권리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그리고 그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며 규제하고 있는 법에서 모든 생명체의 생명권이 동등하게 취급되고 있지는 않다. 대표적인 예가 뇌사상태 인간의 생명에 대한 사회적 이해다. 뇌사자의 장기기증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독려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사회적 관심사다. 인공적인 힘을 빌어 호흡은 하고 있지만 뇌사한 인간에게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 우리사회는 일단 없는 것으로 합의를 본 듯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존엄사 인정 판결 또한 세간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연명치료중단 법제화에 관한 헌법 소원 각하 결정에 이르기까지 존엄사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요즘 많은 불임부부가 시술받고 있는 인공수정은 다태아 임신인 경우 다태아 축소술을 받게 되는데, 이는 불법낙태인가 아닌가? 이처럼 생명권은 다툼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영역처럼 보이지만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세상사 사정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생명의 시작점과 끝나는 점에 대한 숱한 과학적 ․ 사회적 입장과 이론, 이들을 둘러싼 끝나지 않는 논란이 있다는 것을 학자뿐만 아니라 우리 범인들도 더욱 적극적으로 배우고 토론에 함께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정보와 견해가 공개되고 공유되어야 맞다. 그래야만 ‘생명’이라는 절대권력의 단어 앞에서 제대로 된 토론 한번 못해보고 속수무책으로 물러서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수정란, 배아, 태아. 이들의 생명권. 이것은 낙태시술을 받고자 하는 여성의 권리와 늘 대치되는 것이다. 생명권의 온전함과 위대함 앞에서 낙태권은 정말 보잘 것 없고, 입을 떼서 권리를 주장하면 할수록 소수의 이기적인 여자들의 떼쓰는 소리 정도의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모체 안에서 태아의 생명이 유지되어 출산되기까지는 태아는 모체에 전적으로 의존하여야 하는 존재로서, 온전한 인간의 생명권과 그 법적 지위를 동등하게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낙태죄를 살인죄와 동등하게 취급할 수 없는 것이며, 태아 생명 수호의 의무를 개인의 인격권을 초과하는 정도로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태아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임부의 모든 행동은 규제되고 선택되어야 할 것이며,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사회제도 또한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윤리적으로 태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태아에게 생명권의 주체로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서 반드시 분리하여 사고하여야 한다.
낙태를 예방하려면?
낙태를 예방하기 위하여 수정란이 착상되는 순간을 절대화하는 데에만 힘쓰는 것만으로는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낙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첫째, 원하지 않는 낙태를 예방해야 하고 둘째, 원하지 않는 임신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1) 원하지 않는 낙태 예방_출산권
원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낙태하는 일은 오늘도 벌어지고 있다. 낙태권뿐만 아니라 출산권도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단 임신한 십대의 출산권은 깊이 논의되어 본 적도 없다. 오늘 어떤 십대 임부가 낙태를 선택했다면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양육은 차치하고라도 임신과 출산 자체가 불가능한데 그들에게 어떤 다른 선택이 가능할까? 지금 낙태가 아닌 출산을 결정한 십대들은 대부분 학교 다니기를 포기한 경우라는 점, 우리가 모른다고는 못할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왜 낙태를 할까? ‘나 싱글맘으로 살기로 결정했어요’라고 당당하게 선포하는 소수의 여성 뒤에 가족과 직장사람들에서부터 당장 시작될 편견에 찬 시선, 경제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워 낙태를 선택한 이들에게 우리는 ‘불법’이라는 칼을 들이대며 처벌하겠다는 것인가?
비혼모나 십대출산에 대한 편견은 하루이틀 사이에 없어지지 않는다.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고 이에 소용될 시간과 노력, 인력과 예산에 대한 계획이 구체적으로 있어야 한다. 사회적 편견이 당장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편견에 맞서는 일은 개개인이 견뎌낸다 하더라도, 적어도 제도 미비나 돈 때문에 낙태를 선택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십대출산은 무엇보다도 학습권이 보장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모든 중고등학교에 임신 출산한 학생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야 한다. 십대에게는 경제력이 없으니 경제적 지원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비혼모가 가족이나 주변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직장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어떤 제도가 필요할까? 이와 관련한 특별한 대책이 없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충분히 고민조차 해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정확한 비혼모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양육 비혼모 및 입양 비혼모의 수, 비혼모 지원정책이 자리를 잡을 때 예방할 수 있는 낙태의 건수 등이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구체적인 정책 수립도 가능할 것이다. 현재 미혼모자시설은 미등록된 시설까지 모두 30개소인데 그 중 17개소가 입양기관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설들은 “입양을 선택한 미혼모의 경우만 입소하게 하여 지원하는 시설들이 다수”라고 한다. 저소득층의 한부모나 미혼부모가 6세 미만의 아동을 양육할 경우에 한해 월 5만원의 양육비가 지원되고 있는 현실은 비혼모에 대한 지원책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양가족에게는 월10만원의 양육수당을 지급한다)
기혼여성의 낙태를 이야기하기는 좀 더 복잡하다. 사회적 편견도 없고 학습권을 침해당하는 것도 아닌데 감히 낙태라니!라고 호통치는 사람들에게 뭐라 말해야 좋을까? 설문조사에서 터울조절, 자녀불원, 경제적 이유 등으로 표현되는 간단한 이유 이면에는 자녀들의 삶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결정이 있다. 안전한 육아처를 차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자녀들 교육에 드는 비용은 점점 높아만 가고 그렇게 돈을 들여도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를 신뢰하지 못해 아예 해외에 나가는 수가 점점 늘고 있다고 하는데, 세 번째 아이 출산하면 몇 십만원의 축하금이나 공공기관에나 해당하는 정년 연장으로 이런 낙태 이유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가에서 저출산을 염려하며 대책을 내놓은지 몇 해가 지났지만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애를 낳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불만의 소리는 이미 높다.
아이를 키우는 보육기관은 기본적인 사회적 인프라다. 어느 동네, 어느 지역에서 아이를 낳든 그 아이의 보육처가 필요하여 손을 내밀면 언제든지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기다려야 한다거나, 안전을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시설이라거나,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 너무 멀어 접근권이 현저히 떨어진다면 그건 인프라가 아니다. 일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는 기업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효과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나 나타날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나 아빠는 바로 오늘, 야근을 해야하고, 회의에 참석해야 하고, 주요한 사람과의 저녁 약속에 참석해야 한다. 이럴 때 누가 아이의 안전을 책임질 것인가? 7시면 아이를 찾아가야 하는 놀이방, 어린이집? 아이가 학교에 진학하면 사정은 더욱 딱하다. 아이들은 수업이 ‘일찍’ 끝나고 나서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 영어학원, 수학학원을 전전하며 엄마,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까지 밖에서 보내야 한다. 그 사설학원을 전전하는데 드는 비용은 당연히 부모의 몫이다. 적어도 저녁 9시까지는 아이들의 육아, 교육, 방과후를 안전하게 책임질 수 있어야 엄마, 아빠는 늙은 노부모나 경제력이 있는 사람만이 고용할 수 있는 도우미의 도움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다.
진정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생명’이라는 단어가 갖는 그 절대성에 부응하는 수준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아이를 지금 출산해서 양육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인프라는 바로 해결되어야 한다. 앞으로 서서히 개선해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마련되어야 한다. 생명의 소중함이 한 치의 타협이 불가하듯, 그 생명을 사람으로 제대로 키워내는 것까지는 차차 개선해간다 하더라도 적어도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인프라는 한 치도 양보도 있을 수 없다. 그 최소한의 것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법 낙태 운운하는 것은 사실 지나치게 무책임하고 너무나도 뻔뻔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출산보다는 낙태를 부추긴 건 임신한 당사자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다. 지금까지 낙태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우리가 입다물고 있다가, 출산율이 떨어져 국가경쟁력이 염려되는 사태에 이르러서 불법낙태 운운하는 것은 솔직히 무자격자들의 염치없는 선언에 불과하다.
(2) 원하지 않는 임신 예방_피임권
어떤 낙태를 불법화하고, 어떤 낙태를 합법화 할 것인지 아직도 많은 토론이 필요하겠지만, 요즘 언론보도를 보고 있으면 마치 모든 낙태를 불법화하고 철저히 단속하겠다는 것처럼 들려서 마음이 매우 무겁다. 낙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정확하고 확실한 피임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각자 상황에 맞는 피임방법을 선택하고 가능한 실패가 적은 피임실천을 위해서는 당연히 교육이 중요하다. 십대를 무성적인 존재로 전제하거나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식의 교육으로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예방할 수 없다. 그저 어떤 피임방법이 있는지 정도를 알려주는 정도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연령, 결혼여부, 자녀계획, 건강상태(특징) 등에 따라 어떤 방법이 최적인지, 장단점, 비용, 실천방법 등을 상세하게 교육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피임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그 어떤 것도 100% 완전한 것은 없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 중 100%인 것은 별로 없으니 이것도 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될 지 모르겠지만, 이건 소중한 태아의 생명과 소중한 임부의 인격권과 관련되는 일로서, 어쩌다 실패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의술로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완전히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피임술 개발에 우리사회의 의지가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고유한 존재조건인지 더 고민해보아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효과성과 활용성이 뛰어난 피임방법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만 피임권 보장을 위한 사회적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년에 이르는 가임기간 내내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비슷한 시간에 약을 복용하는 것이 활용성이 높은 방법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피임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과 함께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이 보장될 수 있는 사회조건이 마련되어야만 ‘피임권’이 온전히 보장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최적의 방법을 선별하고 선택하며 성관계 과정에서 실천할 수 있을 때에만 피임이 올바로 실천되었다고 할 것인데, 피임방법을 알고 접근할 수도 있는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는, 파트너와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비롯된 성관계 과정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낙태책임, 누구에게 있나?
사회적 인프라가 갖추어지고 우리 사회가 사람이 살만한 사회가 되면 원하지 않는 낙태는 줄어들 것이고, 사회를 믿고 출산하는 사람은 늘어날 것이다. 100% 피임방법이 개발되기만 하면 불가피한 낙태도 발생하지 않을테고, 그렇게만 되면 낙태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들인 노력만큼 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낙태수술 음성화와 같은 여성의 건강을 해치는 위험천만한 결과만을 낳는 낙태 단속은 절대로 해답이 아니다.
삶의 질이 높은 사회에서 낮아졌던 출산율이 다시 상승한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되었다. 한 사회의 삶의 질을 가늠하는 척도로 UNDP에서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 여성권한척도(GEM) 등이 있는데, HDI와 GEM이 높은 국가가 출산율도 높으며,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가 저출산 국가에 속했다. 우리나라는 108개 국가 중 HDI는 22위, GEM은 65위로 OECD국가들 중 하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HDI와 GEM의 격차가 클수록 한 국가의 사회경제발전정도는 높은데 양성평등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HDI와 GEM이 동시에 높은 나라들은 높은 출산율을 보이는 반면, HDI와 GEM의 격차가 큰 우리나라, 일본 등이 세계 최하위의 초저출산 현상을 지속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OECD 국가의 여성경제활동참가율과 출산율을 비교해보아도 여성들의 경체활동참가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출산율도 높게 나타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 나라의 삶의 질이 높을수록, 특히 성평등한 사회일수록 출산율도 높게 나타난다는 것으로 여성의 사회적 삶의 조건이 출산율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 개인이 마치 태아를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이 없어서, 자기 삶에 벌어지는 불편함을 견디기 싫은 이기적인 존재여서 그러는 양 낙태 비난 여론을 조성하지만, 정작 비난의 대상이 여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태아의 존재감을 몸으로 느끼는 것도 여성이고, 태아를 ‘사람’으로 키우는 엄청난 사회적 노동을 실천하는 것도 여전히 대부분 여성 (엄마가 혼자 키우지 못하면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여성 베이비시터 등 여성의 노동력이 저임이거나 무임의 형태로 투입된다. 미혼모 시설 등에서 저임금으로 일하는 노동자도 대부분 여성이다)이다. 그리고 임신 종결을 결정하는 것도 태어날 아이, 이미 태어나 있는 가족과 주변인, 여성이 감내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통합적인 고찰 끝에 내리는 ‘책임있는’ 결론이다. 이 모든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여성을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몰아세우는 사회의 비난은, 안전하게 아이를 맡길 곳 하나 찾기 힘들어 늘 폭력과 사고의 위험에 내몰려있는 아이를 둔 일하는 어머니의 불안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자신을 성폭행한 가족이 살고 있는 가정이라는 공간 외에는 달리 갈 데가 없어 오늘도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 누구의 책임인지, 그 존엄한 생명들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돌보고 있는 것인지는 대답하지 않고 있다.
삶의 권리, 낙태권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를 합법화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뜨겁다. ‘사회경제적’이라는 단어에 포함되는 사유는 바로 앞에서 말한 ‘책임있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고려된 사유들이다.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는 순간이나 배아가 세포분열하는 과정을 절대화하는데 힘쓰는 것만으로, 태아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여 사회적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구성원들의 삶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우리는 어떤 의무와 책임이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결과를 실천해야 한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온전히 예방할 수 없고, 완벽한 조건을 갖춘 이상사회 또한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고민과 실천에는 합리적인 내용과 방식으로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하는 내용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날 토론회에서 요즘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진오비 의사회의 대변인인 최안나 원장이 첫 번째로 발표하였습니다. 최 원장은 불법낙태의 실태, 낙태한 태아의 사진, 낙태한 잔유물의 처리 실태 등을 언급하며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객석에 앉아있던 진오비 소속의 한 의사는 "낙태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열심히 설득해서 애를 낳게 한 산모한테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맞는 것이냐?"며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참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낙태가 손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든 일이면 자신이 낙태를 한 병원에는 다시 가고 싶지 않고, 낙태시술을 해준 의사에게는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기도 어렵겠습까? 그만큼 낙태는 자신과 가족, 앞으로 태어나게 될 아이의 상황 등을 모두 고려한 끝에 내리는 아주 힘겨운 결정입니다.
저는 의사는 아니지만, 의사에게도 낙태에 관한 상담을 하고, 결정과정에 함께 하고, 마지막으로 시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쉽고 행복한 일만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의료행위에는 그렇지 않은 어려운 일도 많이 있겠지요.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만나고, 치료와 완쾌를 위해 쉽지 않은 도전과 시도도 해야하는 힘겨운 직업일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토론자로 참석했던 낙태반대운동연합의 김현철 부회장은 태아모양으로 만든 인형을 직접 들고 나와 보여주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쉽게 죽일 수 있느냐?”며 태아와 인간은 동일한 생명체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수 십 년 전에 뱃속의 아이를 낙태하기로 마음먹었다가 마지막에 생각을 바꾸신 어머니 덕분에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 있다는 말씀도 덧붙이더군요.
마음 속에 참으로 많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김현철 부회장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낙태를 하지 않기로 한 결정의 순간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결정 이후에 어머니는 열 달 동안 아이를 뱃속에서 키우셨고, 출산한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육아노동에 쏟아부으셨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뭐 며칠 밤을 새워서 이야기하기에도 부족하겠지요. 수정란이 의젓한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어머니와 가족들의 노동이,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교육과 지원 등 갖가지 투자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성인으로서의 존재감을 수정란이 만들어져 자궁에 착상된 순간으로 환원해서 이야기한다면 그건 출산, 육아, 교육, 재교육 등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정란과 인간은 동일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비혼모들을 위한 지원책이 너무나도 미비한 우리의 사회제도는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십대들이 퇴학을 결심하지 않고는 출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우리 사회의 미개한 수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죠. OECD국가 중 여성권한척도(GEM)가 높은 사회일수록,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은 국가일수록 출산율도 높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여성들의 교육수준은 높은데 권한은 낮은 나라일수록 출산율이 아주 낮은 초저출산 국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를 위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떤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과제를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서 불법 낙태 단속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태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태아의 생명권과 인간의 생명권을 동등하게 보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법에서도 살인죄와 낙태죄는 그 죄값이 동등하지 않습니다.) 이를 혼동하면 신중한 낙태 선택마저 부정하는 잘못된 결과를 낳게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