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여성우리웹진 0901 '여우사이' 기고/ 성문화운동팀 이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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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 국회의원이 대학생들과 가진 술자리에서 있었던 성희롱발언으로 여론이 뜨거워지면서, 다시 성희롱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에서 성희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93년 서울대 교수에 의한 성희롱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인데, 당시에도 ‘손 한 번 잡는데 3천만원이냐’라는 말이 유행하는 등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성희롱이 법제화된 지 10여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성희롱의 범위와 판단기준을 둘러싼 문제는 논란이 되고 있다.
직장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성희롱 상황을 한번 예로 들어보자. 한 여직원이 회식자리에서 (남성)부장님이 옆으로 오라고 해서 술을 한 잔 따라보라고 하더니, “남자친구는 있느냐? 휴가는 남자친구랑 같이 갔냐” 등 개인적인 일을 묻다가, 이야기 끝에 “이번에 잘해보자”며 손을 툭툭 치셨다. 노래방에 가서는 부장님이 블루스를 추자고 손을 내밀어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성희롱일까?
현재 성희롱은 「남녀고용평등법」과 「국가인권위원회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업무, 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그 밖의 요구 등에 대한 불응을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성희롱에 해당하는 유형 자체가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는 신체적 접촉부터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음란한 농담까지 매우 다양하다보니 「남녀고용평등법」 시행규칙 제2조에서는 구체적으로 성희롱에 해당하는 유형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희롱의 판단기준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녀고용평등법」 시행규칙 제2조(별표) - 성희롱이 성립하는 성적 언동의 유형 >
육체적 행위 | 1. 입맞춤이나 포옹, 뒤에서 껴안는 등의 신체적 접촉 행위 2. 가슴, 엉덩이 등 특정 신체부위를 만지는 행위 3. 안마나 애무를 강요하는 행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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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행위 | 1. 음란한 농담을 하거나 음탕하고 상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행위(전화통화를 포함) 2. 외모에 대한 성적인 비유나 평가를 한 행위 3. 성적인 사실관계를 묻거나 성적인 내용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유포하는 행위 4. 성적인 관계를 강요하거나 회유하는 행위 5. 회식자리 등에서 무리하게 옆에 앉혀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행위 |
시각적 행위 | 1. 음란한 사진, 그림, 낙서, 출판물 등을 게시하거나 보여주는 행위(컴퓨터통신,팩스 포함) 2. 성과 관련된 자신의 특정 신체부위를 고의적으로 노출하거나 만지는 행위 |
그밖에 사회통념상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언어나 행동 |
앞의 사례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여직원은 처음에야 ‘술김에 그런가’보다 하다가도, 회식자리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면 슬슬 부장님 옆자리를 피하게 될 것이고, 다른 여직원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를 수소문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서 불쾌한 생각이 들어도, 이를 성희롱이라고 법적으로 문제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나만 당하는 일도 아닌데데 유난스럽게 굴면 찍힐 것 같고, 부장이 발뺌하면 증거를 대기도 힘들고, 무엇보다도 앞으로도 계속 부장 얼굴 보면서 같이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장의 입장에서는 굳이 이 여직원을 성희롱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옆에 불러서 회사생활에 어려운 일이 있는지도 물어보고, 격려차 말을 건넨 것일 수도 있다. 각각의 주장이 대립할 때 법적 판단을 위해서는 부장의 말이 맞나, 여직원의 말이 맞나, 부장의 실제 의도가 무엇인가를 따져야 할 것이다. 성희롱의 판단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똑같은 행위라 해도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따라,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서 그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직장이라는 공간은 성희롱뿐만 아니라 상사의 부당한 대우나 동료 사이의 갈등 등 여타의 문제가 있더라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직장에서는 모두와 두루두루 원만하게 잘 지내는 것이 대인관계나 업무협조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장에서 발생하는 많은 갈등이나 문제들이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채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성희롱도 예외는 아닌데, 연합뉴스 기사(“여성직장인 52%, 회식자리 성희롱 경험”, 2008년12월31일자)에 따르면 여성 직장인의 52%가 회식 자리에서 원치않는 신체접촉이나 음담패설 등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으나, 이 가운데 51.2%가 “그냥 넘어갔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는 ‘대응해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33.8%), ‘잘 피하면 되기 때문에’(18.5%), ‘업무상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서’(12.3%) 등을 거론했다. 하지만 이렇듯 여성들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에 제2, 제3의 또 다른 성희롱 피해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너무 뻔하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여성들이 나서서 성희롱을 문제제기하지 않는 한 성희롱이 만연한 현실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때로는 ‘우아하고 착한 여자’보다 ‘까칠하고 독한 년’이 되는 게 더 행복한 일일수도 있다.
어떤 여성들은 승진고지에서 유리한 자리를 점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성’을 활용하여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회식자리에서 알아서 상사 입에 안주를 발라서 넣어주거나, 자신이 먼저 나서서 블루스를 추자고 손을 내미는 등의 행동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들은 일시적으로 이익을 주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여성동료들의 경멸과 비아냥을 들으면서 고까운 것 참아가면서 비위를 맞춘 대가로 남성 상사들이 당신에게 내주는 자리는, 딱 서류 챙겨주고 시종일관 상사의 눈치를 봐야하는 그 자리 이상 이하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성상사의 호의나 친근감은 조금만 선을 넘으면 당신을 위협하는 ‘성희롱’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자. 그때 당신을 도와줄 여성 동료가 주위에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서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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