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성폭력 근절 의지를 보여줘야한다
역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이진한 대구지검 서부지청장(전 서울중앙지검 2차장, 아래 이 검사)이 지난해 12월 26일 송년회 자리에서 여자 기자들에게 성추행을 저지른 사건이 알려진 후 검찰 감찰에서 '경고' 처분을 받으며 사건이 일단락됐는가 했다. 그런데 지난 11일 이번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 이 검사를 형사 고소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또 지난 24일엔 55개 언론사 소속 언론인 884명이 '성평등 취재 환경 마련을 위한 언론인'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 검찰에게 전면 재조사와 이 검사의 중징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사건 발생 두 달여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이진한, 여기자에 "너 참 좋아한다"... 경고 후 고소당하기까지
▲ 이진한 차장검사가 지난해 11월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실종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
ⓒ 이희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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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일 이 검사는 여기자들에게 "내가 참 좋아한다" 등의 말을 하고, 몸을 밀착시키거나 어깨동무, 손 잡기, 허리 껴안기 등 수차례 성폭력을 행사했다. 더욱이 사건의 내용을 보면, 한 피해자가 이진한 검사의 행동을 제지하기 위하여 추행시 손을 뿌리치는 등의 행동들을 하였으나 이 검사는 강제추행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감찰 결과는 시민들을 당혹하게 했다. 대검찰청 내규에는 성 관련 문제가 생겼을 경우, 최하 견책(업무상 과오를 저지른 공무원에게 꾸짖고 타일러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징계 처분) 이상의 징계를 내리도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 대검찰청 감찰본부는 실질적 제재가 이뤄지지 않는 '감찰본부장 경고' 처분과 대구지검 서부지청장으로 이 검사를 발령냄으로써 본 사건의 감찰을 종결했다.
지난 2012년 서울 남부지검의 한 부장검사가 식사자리에서 여기자들의 얼굴과 다리를 만지는 등 강제추행과 언어 성희롱을 한 혐의로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유사 사례가 있었던 점에 비춰보면 이 검사는 현격히 낮은 수준의 징계를 받은 것이다. 특히나 피해자가 '이 검사의 엄중한 처벌을 원한다'는 의사를 감찰위원회 제출 문서에서 밝혔음에도 검찰이 "그런 보고를 받은 바 없다"며 감찰 결과에 반영하지 않는 점 등은 검찰의 태도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밖에도 검찰이 성폭력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미한 징계를 내린 이유들은 모두 납득하기 어렵다. 업무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사례에 비춰볼 때, '고위 공직자 취재원'과 '젊은 여기자'라는 관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이라면 피해자들은 자신의 판단이나 감정을 빠르게 가해자에게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피해자들이 이 검사에게 즉각적으로 항의하지 않은 점을 문제 삼았다가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다.
여기자들과 일 못하겠다는 검찰, 부적절한 발언
한편 이번 고소 사실을 전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검찰 관계자는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된 사건이지만 검사가 연루돼 감찰 성격이 큰 사건이어서 형사1부에 배당됐다"고 밝혔다. 형사 1부는 공무원 범죄 및 공직기강 관련 사건을 맡는 부서다.
고위공직자에 의한 사건이라는 특성상 형사 1부가 수사하는 것이 일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은 수사 담당자의 전문성 등을 이유로 성폭력전담검사 제도를 운영하고 있음에도 가해자가 공직자이기 때문에 형사1부가 전담해서 수사하겠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앞서 내부 감찰 과정에서 피해자의 '엄중한 처벌' 의사를 소홀히 다루고 넘어갔다는 점에서도 성폭력 사건으로서 이번 검찰 수사의 공정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성폭력 범죄의 친고죄(고소권자의 고소가 있어야 공소제기를 할 수 있는 범죄) 조항은 2012년 11월 22일에 전면 폐지되어 2013년 6월 19일부터 개정안이 시행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도 검찰에서 형사사건으로 인지했다면 바로 수사를 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고려 없이 내부 감찰과 징계만 실시한 점에 대해서도 검찰의 해명이 필요하다.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피해자도 이 검사에 대한 처벌 의지를 강하게 보였던 만큼 검찰의 사회적 역할을 고려한다면 이 사건을 형사법에 저촉된 문제로서 그에 응당한 해결과정을 밟았어야 했다.
▲ 대구지역 여성사회시민단체들은 20일 오전 대구서부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진한 서부지검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 |
ⓒ 조정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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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처분이라는 검찰의 경미한 징계에 대해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포함한 여성단체들은 1월 20일과 2월 14일 두 차례에 걸쳐 '엄정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또 이 검사가 대구지검 서부지청장으로 발령받은 이후 지금도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대구·경북지역 여성·시민단체의 1인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검찰의 겸허한 자세는 여전히 부족한 듯하다. 지난 6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이번 사건을 가리켜 "성추행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는 부적절한 발언을 한 일도 있었다. 잘못을 통감하고 성폭력 재발 방지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검찰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 힘들다.
성폭력 근절에 대한 검찰의 의지가 드러나야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더라도 이 검사가 실형선고를 받을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이번 사건은 업무 관계에서 벌어지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으로, 강제추행죄 또는 위계·위력에 의한 추행죄에 해당된다.
공직자들의 경우 유죄선고를 받더라도 양형기준에서 '동종 전과가 없는 자' 또는 '사회에 기여한 자(사회적 유대관계)'에 해당되어 처벌 수위가 높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은 이 검사의 수사 결과뿐만 아니라 검찰의 성폭력 근절 노력을 더 주목할 것이다. 때문에 검찰은 유죄 선고 여부와 형량에 따라 이 사안이 가벼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고위 공직자들의 성폭력 사건은 시민들의 큰 분노를 산 경우가 많았다. 2013년에 논란이 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성폭력 사건은 여전히 미국 연방 검찰에 계류 중으로 미해결 상태이다. 성희롱으로 논란이 된 국회의원들이 재선하거나 공직자리를 꿰차는 것도 마찬가지다.
2012년과 2013년 연이어 발생한 검찰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 이러한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다수의 성폭력 가해자들은 '나는 재수가 없어서 걸린 것, 돈과 권력이 있었더라면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성폭력을 범죄라기보다 사적인 해프닝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사회의 성의식이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의 성폭력 사건이 미해결 되는 사례가 증가할수록 성폭력에 대한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들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성폭력을 뿌리뽑겠다는 검찰의 의지가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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