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2일 토요일, 광화문 세종로 공원 앞에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의 주최로 2017 검은 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가 진행되었습니다.
너무 추워서 참여자들이 힘들어할까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포근하게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먼저 사회자가 행사 취지 및 일정을 설명하고, <낙태죄를 폐지하라> 합창 연습이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웅장한 오케스트라 MR을 배경으로 부르는 첫 번째 노래의 후렴구가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어서 첫번째 자유발언 시간이 있었습니다.
먼저 불꽃페미액션의 변예진 활동가가 청소년이자 여성의 관점으로 낙태죄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발언하였습니다. 이날 변예진 활동가가 발언한 내용은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에서 여성신문에 연속 기고 중인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에도 실렸습니다. (기사 보러가기 클릭)
이어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앎 활동가가 모자보건법 상 인공임신중단 (예외적) 허용 규정의 한계와 모순에 대하여 발언하였습니다. 아래는 발언 전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앎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모자모건법 상에는 인공임신중단을 허용하는 예외 조항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강간 또는 준강간으로 인해 임신한 경우입니다.
때때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낙태가 허용되는데 왜 낙태죄 폐지를 주장합니까?" 이 질문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요. 그 중 두 가지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성폭력 피해자는 예외적으로 인공임신중단을 허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공임심중단이 불법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수술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네가 성폭력 피해로 인해 임신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피해자는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원치 않는 고소를 해야만 하는 현실입니다. 이런 경우에 피해자는 '성폭력 아닌데 그냥 낙태하려고 고소한 거 아니야?'라는 의심을 받게 되기 십상이고, 심지어는 검사나 가해자에 의해 '무고'로 몰릴 위험에 처합니다.
둘째로 법에서 인정하는 성폭력의 범위가 너무 협소하여, 모자보건법 상 예외조항으로는 성폭력 피해자를 모두 '구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강간, 준강간이라는 법적 용어는 여성의 경험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않습니다. 폭행 협박에 의한 강간?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한 준강간? 수많은 무죄 판결을 통해 우리는 법원이 성폭력을 얼마나 좁게 해석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이 겪는 성폭력은 그보다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한 맥락 속에서 벌어집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이따금 임신 중단에 관한 문의를 받습니다. 어떤 내담자는 직접적으로 '성폭력은 아니었는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많은 경우 그 말은 신체적인 폭행 협박이 없었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권력의 차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피해자의 위치성 때문에 원치 않는 성관계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경우, 동의 하에 성관계를 했지만 상대가 몰래 콘돔을 뺀 경우, 여성의 삶과 경험 속에서 이것은 명백한 성폭력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성폭력으로 인정받기 어렵고, 이런 경우에 임신을 하게 되면 모자보건법 상 예외조항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여성의 임신중단을 '낙태'죄라고,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것은 누군가의 주장처럼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기 위함도 아니고 여성을 보호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이것은 국가와 사회가 인구 통제를 위해 여성의 행복추구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면서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생명'은 선별하겠다는 메시지이며, 강간 또는 준강간 정도의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임신 및 임신중단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여성에게 지우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간접적으로 징벌하겠다는 메시지에 불과합니다.
국가는 더이상 여성의 경험을 협소한 법의 언어로 조각내지 말고 여성의 임신중단이 예외적 허용 사유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시혜적으로 평가 하지도 말고, 지금 당장 낙태죄를 폐지하기 바랍니다.
서로 나누고 싶은 말은 가득했지만, 잠시 자유발언을 멈추고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불꽃페미액션의 깃발을 선두로 약 300명의 참여자가 당당하게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습니다.
세종로공원에서 경복궁역, 자하문로를 지나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이 지어졌고, 청와대 앞 청운동 동사무소 인근 길가에서 2차 자유발언이 이어졌습니다.
ⓒ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윤정원 녹생병원 산부인과장은 합법적으로 인공임신중단 시술을 해온 의사로서 지켜봐 온 여러 가지 사례들에 대하여 발언하였고,
박차옥경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도 그 동안 가족계획 정책에 따라 인공임신중단을 금지하기도 하고 조장하기도 했던 국가의 모순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1980~1990년대에 성행했던 '여아 낙태'문제에는 침묵했던 국가가 왜 이제 와서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느냐고 꼬집었습니다.
그 외에도 참여자들의 자발적인 즉흥 발언이 이어졌습니다.
세종로 공원으로 돌아온 우리는 너무나도 할 말이 많고, 나누고 싶은 고민이 많아, 다시 자유발언을 이어갔습니다.
"장애여성은 안전한 시술 이전에 병원 접근권이 먼저 필요합니다. 가임기여성지도까지 만드는 정부가 왜 산부인과 물리적 접근권을 이대로 두는 겁니까. 모자보건법중 유전적 우생학적 사유는 없어져야합니다. 사회경제적 사유도 자본주의 사회에선 우생학입니다" 라는 장애여성공감 활동가의 발언
여아 낙태를 뚫고 간신히 태어난 여성들이 왜 낙태죄라는 독박처벌까지 감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왜 여성이 먹는 피임약은 티비광고에 나오면서 남자가 껴야하는 콘돔약은 광고를 안하는 걸까요?" 라고 의문을 제기한 여성 작가의 발언
"성매매 여성의 임신중절은 지원상담소에서도 지원이 불가합니다. 출산지원은 되는데 말입니다. 성매매여성이 왜 임신을 하게 되는지, 왜 성구매자가 콘돔을 쓰지 않는지 이걸 구조적 젠더폭력으로 전혀 보지 않는 것이죠" 라며 반성매매 활동 과정에서 느낀 고민을 함께 나누어준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활동가의 발언
"내가 어떤 젠더 지향으로 살아가는지 내 의사를 밝혀도 계속 나를 특정한 성적지향으로 부르고 생각해버리는 게 싫어요. 이런 사회를 바꾸어가는 행동 중 하나가 낙태죄폐지라고 생각해서 왔습니다"라는 어느 대학생의 발언 등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습니다.
페미당당의 예원 활동가는 원 글쓴이의 허락을 받고, 성판매여성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지글에 올라온 인공임신중단 당사자의 글을 대독하기도 하였습니다.
"의사선생님은 젊은 애가 왜 그렇게 사냐고 말했고, 동의서 때문에 연락한 엄마는 부끄러운줄 알라고 비난했습니다. 병원에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네네 할수 밖에 없었어요. 어린 시절 집에서 겪었던 성폭력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샤워기 찬물을 배에 대고만 있었습니다. 임신이 떠올랐고 걱정되어서요.
임신 출산을 국민의 책임으로 말하는 국가는 비혼여성 레즈비언 게이는 성을 쾌락으로만 이용한다고 비난합니다. 반면에 국가는 대부분의 여성을 재생산의 도구로 억압 통제해서 하나의 정해진 모습으로 살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라는 진솔한 경험담과 예리한 일침은 많은 참여자들의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원글 보러가기 클릭)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나영 활동가는 레즈비언으로서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함께 해온 이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었고, 페이스북을 통해 발언문 전문을 공유해주었습니다. (발언문 보러가기 클릭)
마지막으로 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 함창을 한 뒤, 2017 검은 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끝까지 남고, 점점 늘어나기까지 한 참여자들은, 오늘은 '친절한 청와대' 답변에 부쳐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구호를 외쳤지만, 다음 번에는 국회 앞으로 가게 될지, 헌법재판소 앞으로 가게 될지,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고 웃으며, '낙태죄'가 폐지되는 그 날까지 계속 행동하고 주장할 것임을 결의하였습니다.
이번 2017 검은시위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낙태죄 폐지'는 정부의 역할이 아닌데 왜 청와대를 향해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요. 관련해서는 성과재생산포럼이 발표한 논평을 공유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친절한 청와대’에게 보내는 ‘친절한 논평’-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에 부쳐 보러가기 클릭)
<이 글은 본 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앎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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