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들은 역고소를 멈춰야 합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과정입니다.
성폭력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남성중심적 언어에 대해 온 몸과 마음으로 맞서 싸우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고소를 결심 후 제일 먼저 이것이 성폭력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스스로와의 확신에 맞서야 하고, 다음으로 수사/재판 과정에서 ‘진짜 성폭력’을 요구하는 각종 질문과 불신에 맞서 성폭력 통념과 싸워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피해자가 술에 취했다거나,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였다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의 화살로 다가오고, 곧이어 ‘꽃뱀’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성폭력 사건의 판도가 뒤바뀌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피해자가 가해자의 위치가 되어,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피해에 노출되는 고소들을 ‘성폭력 역고소’라고 부릅니다.
성폭력 역고소는 가해자가 피소이후 피해자를 무고로 고소하거나, 성폭력 피해자의 고소 여부와 상관없이 피해자를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거나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위증, 협박, 모욕, 공갈, 강요죄 등 그 수단은 다양합니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자신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도록 협박하거나 더 이상의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수단으로 역고소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반성폭력운동 단체에서는 지난 수십년간 이러한 통념에 맞서 싸워왔지만, 공교롭게도 인식의 개선없이 양형만 강화되는 사이에 법의 틈새는 더 많은 ‘꽃뱀’을 양산하고, 가해자와 변호인들은 무혐의가 무고인양, 성폭력 사실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여론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2017년 11월 16일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최종 보고회 현장>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에서는 용기있는 피해자들이 피의자로, 피고인으로 전환되고 오히려 감옥에서 실형까지 살게됨에도 제도적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에 문제제기하기 위하여 지난 1년동안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여성가족부의 후원을 받아 진행된 이 안내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자문위원이신 허민숙, 김홍미리 선생님과 더불어 협력단체로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들이 함께 하면서 우리의 체감은 현실이고 또 다른 국면의 반성폭력운동과 마주하게 되었음을 나날이 각성해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안내서에는 역고소의 배경, 유형별 특징, 대응방법과 실제 사례, 판례들을 제시하여, 현장의 이야기들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안내서를 발간하고, 하루도 안 되어 2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료를 신청해주셨고, 지지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덧붙이는 말에는 “나도 피해를 입었다”, “제목만 봐도 눈물이 난다”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담겨 있었고, 그 한 분, 한 분의 목소리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반성폭력 연구자와 운동가들이 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하는 절절한 목소리들이었습니다.
성적 행동에 대한 동의는 ‘적극적 합의’로부터 비롯되고, 무혐의는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음을 증명하지 못한 실패한 조사임을 기억하며, 역고소의 피의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당당한 피해자임이 잊혀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 수사/재판관, 언론인, 그리고 거대한 성폭력 통념이라는 벽에 계속되는 대항담론과 운동을 만들어 나가야할 우리의 과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안내서가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 표지>
* 이 안내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에서 곧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 김보화(파이)가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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