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터 83호 <생존자의 목소리 ③>



숨기는 옷[각주:1]

 - 이린아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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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는 옷으로

성별이 생긴다.


부끄러운 옷.


숨기는 옷에는 끝의 냄새가 난다. 아슬아슬한 말끝에 입는 옷, 단단하게 늙은 늑골이 물렁해진 끝.


버클에는 뭉개진 립스틱과 색 바랜 빨래집게, 뒤집힌 베겟잇, 올 나간 스타킹 같은 무심한 하녀들만 걸렸다. 혼자만 보기로 하고 방안에 숨겨놓은 타인. 거울은 옥상 위 늘어진 빨랫줄의 텅 빈 미열을 비췄다. 정원에는 자갈이 많았다. 자갈은 스스로 정원을 유혹하지 못하지만, 변명을 둘러대며 굴러 다녔다. 자갈을 굴리지 말아줘, 흥에 취하면 정원은 꼼짝없이 타버렸다.


수염을 기르고 오른쪽 젖가슴을 용감하게 잘랐다. 멋지게 활을 쏘려면 시끄럽게 울지 않아야 하니까. 오락가락하던 창살이 기어코 터져 나오지 않도록 숨기는 의자가 있고 종아리가 있다. 빨랫줄에 걸린 두 개의 생식기, 달팽이가 느린 건 사랑도 해야 하고 전쟁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네를 타고 여름 별장에 다녀 올 거야. 매끈한 팔짱을 끼고 하얗고 검은 털을 가진 말을 타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숨겨놓은 옷들을 어른스럽게 꽉 쥐고.




  1. <시와표현> 2018년 6월호 수록 [본문으로]
Posted by 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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