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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터 86호 <생존자의 목소리①> 목소리 - 지안 본문

성폭력에 대해서/[나눔터] 생존자의 목소리

나눔터 86호 <생존자의 목소리①> 목소리 - 지안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2020. 9. 1. 16:11

목소리

 

지안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메일 (ksvrc@sisters.or.kr)로 보내주세요. ☞[자세한 안내 보기]

책자 형태인 [나눔터]를 직접 받아보고 싶은 분은 [회원가입]을 클릭해주세요.

 

그때 그 비좁은 다락방 안에서 당신에게 눌려
납작하고 좁아진 자아가 이제야 숨을 토한다.
너무 숨 쉬고 싶었다고.
너무너무 숨 막혔다고.


피해자가 40년을 단지 생존하느라 버둥대는 동안
당신은 지금껏 태어나지도 않았지.
당신에게 이름을 주겠다.
이제부터 이것이 당신의 이름이다.
가해자.
이것이 이제부터 평생까지의 당신 이름이야.

 

당신이 나의 자연을 더럽히고 어지럽혔어.
그때부터 나는 자기를 주인으로 삼는 일에 어렵고
어디에 있어도 내 자리를 잃고 말았다.
당신이 시작이야.


내 부모의 장례식에 나타나
뻔뻔해도 되는지 아닌지 눈치 보던 그 얼굴.
조문은 그동안 가책 없이 살아온 자신에게나 해.


잘못을 알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 봐.

반성하지도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각성하지도 말고
용서를 구하지도 말아.
당신에게 내가 줄 것은 오로지 가해자. 이 세 글자뿐.
그 날 이후로 당신의 모든 것이 잘못이고
절대로 그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려지지 않아.
하지만 나는 혼자 지던 기억을 당신에게 넘겨주고
가벼워질 수 있지.
당신은 누구의 허락도 구할 수 없다.

당신을 용서할 이는 없다.
당신이 구원받을 길은 없다.


내가 당신에게 이 모든 화살을 돌리고
이 터널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이 터널의 주인은 당신이 되겠지.
영원히 갇혀.
저지른 잘못을 곰곰이 새기다가 늙고 지치고
병들어.
이 목소리가 명령한다.
죽지 말고 병들어.
가해자의 이름으로 병들어
영원히 사라지지 마.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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