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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피해자의 용기를 기억하며,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2022년 9월 14일 밤, 근무지인 신당역에서 순찰을 돌던 여성노동자가 살해당했습니다. 가해자는 3년 동안 그를 스토킹했던 직장 동기였고, 불법촬영/협박 및 스토킹범죄로 9년형을 구형받은 상황이었습니다. 또 다시 반복된 여성 살해에 비통하기도 잠시, 서울교통공사와 사법부가 해당 사건에 안일하게 대응했음이 드러났고, 자극적이고 무책임한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과 망언을 거듭하는 정치권에 시민의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지난 22일 저녁 7시, 보신각에는 검은 복장으로 피해자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도 공동주최단위로서 그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가슴에는 하얀 리본을, 손에는 피켓을 들고 여성노동자의 안전과 일상을 이어갈 권리를 외쳤습니다.

 

 

 

 여성노동연대회의가 주관한 추모집회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 신당역 여성노동자 스토킹 살해에 분노하며’는 피해자를 위한 묵념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이어 미리 예정되었던 5인의 발언이 시작했습니다. 차분하지만 강한 결의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발언을 시작한 이현경 공공운수노조 서울교통공사 조합원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대책이랍시고 여성을 당직에서 빼겠다고 말한 서울교통공사 사장을 언급하며 “죽지 않고 일하고 싶다고 요구했는데 왜 여성을 업무에서 배제하는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여성노동자의 권리가, 여성의 권리가 보장될 때 모든 노동자의 권리가, 시민의 권리가 보장된다”며 서울교통공사의 제대로 된 대책 마련을 촉구했습니다.

 박지수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 활동가는 ‘보복범죄’라는 단어가 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게한다며, “(자극적인 보도 대신)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안하는 언론이어야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황연주 젠더정치연구소 사무국장은 정치권과 사법권에 책임을 물었습니다.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맞선 피해자를 언급하며, “제대로 응답하지 않은 것은 서울교통공사와 사법부, 정치였다. 그간 수많은 여성들의 외침에 응답하지 않았던 국가와 정치가 죽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피해자가 충분히 상담받았다면 조치가 강화됐을 것’이라는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의 발언에 대해 “정부 부처의 장관으로서, 여성폭력을 방지하고 성평등 정책 전담부처인 여성가족부의 장관으로서의 소임을 망각한 발언”이라고 규탄했습니다.

 도지현 여성의전화 활동가는 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를 한계라고 짚으며 “스토킹 처벌법 보완하라는 대통령의 말이 임시방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외쳤고, 한국여성노동자회 노헬레나 연대사업국장은 “이 사건은 한 명의 가해자가 충동적으로 벌인 참극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성차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사건”이라며 한국 사회의 젠더감수성 부족을 짚었습니다.

 이어, 현장에서 발언을 신청한 시민들의 연대발언이 일대에 울려 퍼졌습니다. 자신을 경찰청 행정사무원이라고 밝힌 한 시민은 근무 중 겪은 일들을 공유하며, 한국 여성의 삶에 여성혐오가 얼마나 밀착되어있는지 참여자들의 공감을 샀습니다.

 또, 한국여성노동자회 노헬레나 연대사업국장은 서울교통공사의 과거 채용성차별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여성노동자가 일하기 위해 필요한 시설의 부재는 여성 지원자를 뽑지 않는 것으로 해결합니다. 직장 내에서 젠더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인 여성을 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듭니다. 가해자를 제대로 징계하고 젠더폭력에 대한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조직 내에 만연한 성차별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삭제하고 배제함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조직이었습니다”라며 성차별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대응하는 공사의 태도를 꼬집었습니다.

이후, 영화감독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신승은님이 추모공연으로 마음을 보탰습니다. 잔잔하게 흐르는 멜로디 속에서 참여자들은 결의를 다지기도 하고,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끝까지 맞선 피해자의 용기를 떠올리기도 하는 듯 했습니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 네가 말하고 왔던 날

나는 얘길 듣다 술집에서 갑자기 펑펑 울었지

(중략)

나는 나의 그런 순간들에 그러지 못했었지”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널 의심하지 마

나는 네가 너여서 얼마나 고마운데”

 

“나는 네가 있다면 뭐든 무섭지 않아

그래서 네가 갈까봐 나는 너무 무서워”

 

 이어서 단체 퍼포먼스가 있었습니다. 입장할 때 미리 나눠받았던 흰색 끈을 연결해 들어올리며, 우리가 서로의 안전망이 되자는 다짐을 나눴습니다. 여성폭력에 대항하는 마음 하나로 한자리에 모인 옆자리 동료와 흰 끈으로 묶은 연대의 매듭이 어떤 약속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우리 끝까지 싸우자. 서로의 안전한 일상을 지키자.”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하얀리본은 2016년에 있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의 추모의 상징이기도 한데요. 신당역 여성노동자 스토킹 살해사건을 접하고, 6년 전의 이 사건이 떠오른 것은 단순히 피해장소가 화장실이라는 공통점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여성을 노린 계획범죄임에도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는 경찰과 정부부처, 가해자의 서사에 이입하고 자극적인 언어 선택으로 대중의 이목만을 끄는 언론 등 우리는 여러 부분에서 한국 사회는 변하지 않았음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며 가해자를 자신과 분리하는 행태를 보면 기가 찹니다. 가부장적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에게는 나도 모르게 답습한 여성혐오가 내재하고 있음을, 그 혐오가 구조적 성차별을 공고히 하고 있음을 왜 모르는 걸까요? 왜 알면서도 외면하는 걸까요?

 

 퍼포먼스를 마치고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시민들의 참여로, 약 500명의 참여자가 안전한 행진을 위해 대열을 맞추고 출발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홍보팀의 닻별활동가는 선두에 선 트럭에 올라 발언했는데요.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기 위해 끝까지 맞선 피해자를 추모하고, 그의 죽음에 우리 사회의 책임이 있음을 일갈했습니다. 발언 전문을 공유합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아주 쉽게 통념 속 피해자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유약하고,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피해자는 사건으로부터 배제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성폭력 피해자 역시 사건을 마주한 이후 다양한 선택을 합니다. 신당역 여성노동자 스토킹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적극적으로 가해자에 맞서 싸우기를 선택했습니다. 경찰에 신고하고, 접근금지조치를 요청하고,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정에도 적극적으로 엄벌을 탄원했습니다. 사건을 진행하면서도 꿋꿋이 일상을 유지하며 성실히 일하는 노동자였습니다.

피해자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을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직장, 사법부, 정치권은 피해자의 노력에 떳떳할 수 있습니까?

피해자가 가해자를 신고하고 나서 가해자의 근무지에 압수수색이 있었다고 합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 중에서는 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증언들도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가해자는 직위해제 상태에서도 접근 가능한 내부 전산망을 이용해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빼냈습니다. 서울교통공사는 제대로 피해자 보호조치를 시행했습니까? 내부 성폭력사건 대응 매뉴얼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습니까? 아니, 매뉴얼이 존재하기는 합니까?


서울교통공사 김상범 사장은 20일 있었던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성 노동자의 당직 근무를 줄이겠다”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안전히 보호하기 위해 노동현장에서 배제하겠다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고리타분하기까지 합니다. 노동자를 노동현장에서 제외하는 것이 서울교통공사의 총책임자로서 제안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입니까? ‘남성이 아닌 존재들 역시도 남성과 동등한 사람임을 인정해라!’ 이 말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10년 전부터 노조에서 제안해온 것처럼 2인 1조 체제를 도입하는 등, 여성 직원의 업무 범위를 제한/축소하지 않는 제대로 된 대안을 마련하십시오.


그럼 사법부는 어떨까요. 피해자의 죽음에 사법부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가해자는 무려 300회가 넘는 스토킹을 해온 사람이었습니다.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격리해야할 필요성이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도주의 여지가 없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재판부는 대체 누구에게 이입하고 있습니까?

가해자의 반성문, 인적사항, 탄원서 등을 읽으며 가해자에 측은함을 느끼고 가해자 서사에 이입하는 일은 하루이틀 일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사법부는 가해자에 이입할까요. 피고인이기 때문에 재판의 주체가 되는 가해자와는 달리 피해자는 재판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검사가 피고인의 반대편에 서 있을 뿐, 피해자는 사건의 증인으로만 재판 과정에 등장합니다. 이런 구조라면 당연히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법부는 피해자가 사건 해결의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다양한 사법절차 시스템을 마련하고, 가해자의 목소리 대신 피해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십시오.

윤석열 대통령은 선거운동 당시부터 지금까지 페미니즘 혐오선동을 표심 잡기용으로 악용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피해자에 대한 악의적 가십이 진실인 것처럼 무려 언론을 통해 유통되어 2차피해를 낳고, 의미 없는 손모양 논란에 효능감을 얻은 집단이 과다대표되어 공론장에서 목소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윤석열이 당선되었을 때 사무실로 걸려온 전화는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윤석열이 당선되면 여가부가 없어진다는데, 저 앞으로도 피해자 지원 받을 수 있을까요?” 누가 피해자들을 위축시켰습니까?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까 폭력적인 대응을 가해자가 한 거 아니냐”며 가해자 서사에 이입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법/정책의 입안자로서 포진해있기 때문 아닙니까?

여성가족부 김현숙 장관은 어떻습니까? 후보자 인사청문회부터 지금까지 일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명백히 존재하는 여성혐오를 외면하고, 여성폭력을 젠더관점이 아닌 치안의 관점에서 다루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하대 성폭력 사건 이후 겨우 두 달이 지났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엄정한 법 집행과 실제적 피해자 보호’가 필요하다는 말만 반복할 겁니까? 성폭력은 법치주의의 실현과 치안강국으로의 전환으로 예방할 수 있는 성격의 폭력이 아닙니다.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사회가 성폭력을 방조하고, 적극적으로 묵인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여성가족부에 조금 더 빨리 지원을 요청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는데, 본인의 소명대로 여가부가 폐지되고 나면 피해자는 어디로, 어떻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까? 성폭력에 대한 관점조차 부재한 법무부? 디지털성폭력대응TF를 임기 시작하자마자 없애버린 부처가 성폭력 문제를 여가부가 해왔던 것처럼 잘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이상 동료 시민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윤석열 정부, 김현숙 장관과 여성가족부는 멀쩡히 기능하는 부처를 폐지하겠다는 허튼소리 대신 젠더 관점의 성평등 로드맵을 수립하고 성평등 정책을 강화하십시오.

 2004년 유영철이 여성 대상 연쇄살인을 저질렀을때, 언론에서는 온종일 “여성들은 밤길을 조심히 다녀야 성폭력을 피할 수 있다”고 떠들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에 항의하며 밤길되찾기시위(달빛시위)를 열었습니다. 당시 성명서 문구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발언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들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요구하고 조장하는 그 어떤 언행도, 여성들의 운신의 권리, 몸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자 폭력임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우리의 이 모든 권리의 보장을 위해 변화해야 함을 요구합니다.

밤길을 자유롭게 다닐 권리, 동료를 동료로서 신뢰할 권리, 안전한 직장생활을 할 권리, 동등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말하고 생각하고 운신할 권리가 더이상 침해되지 않고 완전히 보장되는 그 날까지, 설치고 말하고 떠들다가 힘들면 쉬어가기도 하면서 오래오래 함께 갑시다.

고인의 용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울컥 차오르는 발언들을 이어 들으며, 보신각에서 출발한 행렬은 을지로입구역, 시청역, 광화문역을 지나 다시 보신각으로 돌아왔습니다. 시간관계상 미루었던 두 시민의 현장발언을 끝으로 집회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검은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보신각에서 저는 지난 저의 일상을 잠시 돌아보았습니다. 친구와 헤어지며 당연하게 나누는 ‘조심해서 가’라는 인사, 공중화장실의 나사 구멍에 돌돌 말아넣은 휴지, 서둘러 현관문을 닫으며 굳게 걸어잠그는 육각자물쇠, 밤 늦게 집에 돌아갈 때는 통화하는 척이라도 해야 안심이 되는, 그 마음. 한국에 사는 여성의 마음들.

 여성을 틀림없는 국민으로 생각한다면, 국가는 응당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앞으로도 국가가 그 의무를 다 하고 있는지 지켜볼 것입니다. 모든 이의 안전한 일상이 당연스레 보장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저항하겠습니다.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이 후기는 회원홍보팀 산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