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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는 지금

[성폭력 뒤집기] 추천의 글: 페르세포네, 다프네, 아르테미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개소 20주년을 맞아 지난 20년의 활동을 돌아보면서 우리사회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와 과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내용으로 <성폭력 뒤집기>(2011, 한국성폭력상담소 엮음, 이매진 출판사)를 출판하였습니다.
아래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활동가로 활동했던 가을 님이 <성폭력 뒤집기> 읽고 쓰신 추천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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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포네, 다프네, 아르테미스

보르게제 미술관에서의 일이다. 전시실에 들어가서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나는 눈앞에 벌어지는 충격적인 광경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겁에 질린 소녀의 소리없는 비명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옷이 벗겨진 소녀의 허리와 허벅지는 건장한 성인남자의 양손에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다. 공포에 사로잡힌 소녀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사냥감을 포획한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그 곁에는 주인을 닮은 사냥개가 짖고 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주위를 둘러보자, 이번에는 손을 쳐들며 다급하게 달려오는 처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도움을 요청하는 듯 입을 크게 벌린다. 하지만 바로 뒤쫓아 온 청년의 손에 이미 붙들렸다. 그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듯하지만, 그녀의 몸은 두려움으로 굳어 한 그루 나무로 붙박인다.

앞의 장면은 베르니니의 조각품 <페르세포네의 강간>이고, 다음 장면은 같은 이의 작품 <아폴론과 다프네>이다. 전자는 저승의 신 하데스가 여신 페르세포네를 겁탈하기 위해 납치하는 장면인데, 올림포스 신들의 계보에서 보면 삼촌과 조카 사이이니 근친강간, 친족성폭력에 해당한다. 페르세포네는 아버지 제우스 신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하지만, 외면당한다. 제우스는 신들의 제왕이지만 신들의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딸을 희생시킨다. 후자는 아폴론이 다프네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청혼하지만 다프네가 거절의 뜻으로 달아나는 장면인데, 아폴론은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쫓아간다. 아폴론은 절대권력 제우스 신의 총애를 받는 아들이자 태양의 신이고 다프네는 강의 요정에 불과하니 위계에 의한 성폭력에 해당한다. 다프네가 나무로 변하지 않았다면 그의 손에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의 일이다. 전에 상담원 교육을 받느라 상담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도 합정역 몇 번 출구 방향인지를 잊어버려 나는 한참을 길에서 헤맸다. 때마침 눈발이 날려 얼굴도 손도 꽁꽁 얼어붙었다. 굽이굽이 골목길을 돌아 단아한 이층집 계단을 올라가자, 활동가들이 나의 빨개진 손을 꼬옥 잡고 맞아주었다. 당시 소장이던 이미경 님은 나를 지하실로 데려가 방방마다 서재에 빼곡히 들어찬 상담일지를 보여주었다. 1991년 개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련번호가 매겨져 상담일시와 피해자·가해자 인적사항과 피해유형, 법적 절차, 상담원 지원내용 등이 차곡차곡 담겨 있는 상담일지들이 그간 숱하게 흘렸을 피해자의 눈물과 상담소의 땀을 증거하고 있었다. 상담소가 더 일찍 문을 열었다면 내담자로서 나의 기록도 있을 텐데, 이제 상담자원활동가로서 상담일지를 작성하게 될 터였다. 또한 우리나라 성폭력 실태조사와 그 원인을 연구한 자료집과 논문들, 성폭력특별법 제정과 제도적 지원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분투한 기록들, 반성폭력 운동으로서 성문화변화 운동과 교육 현장을 찍은 사진들이 벽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현재 고통받는 피해여성들을 위해 실질적 지원을 제공하고자 하는 열망’의 산물이었다. 한국사회 최초의 성폭력문제전문상담기관으로서 선구자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견뎌내고 이후 전국에 160여 개 성폭력상담소의 산파 역할을 자임한 지난한 시간이 느껴져 숙연해졌다.

아르테미스는 인간이 거주하지 않는 숲과 산, 들판의 수호신이다. 그녀는 올림포스 궁전에 살지 않고 숲에서 산다. 그녀는 요정들과 사냥개 무리를 이끌고 산과 들을 질주하며 사냥을 즐기는데, 그녀가 쏜 화살은 반드시 과녁을 명중한다. 그녀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강렬하게 집중할 수 있다. 아르테미스는 단호하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구해준다. 어머니 레토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와 어머니를 겁탈하려던 거인신을 그 자리에서 활로 쏘아 죽인다.

페르세포네가 납치될 때 아르테미스가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프네가 잡히기 전에 아르테미스가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여신들과 요정들의 맏언니로 돈독한 자매애로써 약자를 보호하고 백발백중의 명사수인 아르테미스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피해자들이 그렇게 얼어붙어 무기력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은 신권침해가 자행되는 현장에서 자신을 도와줄 것이 틀림없는 목격자가 있으므로, 고개를 돌려 가해자를 마주 보았을 것이다. 싫다고 말하는 결연한 눈빛에 가해자들은 멈칫했을 것이다. 아르테미스를 뒤따르던 여신들과 요정들의 눈이 무서워 그들은 그 자리를 피했을 지도 모른다. 아르테미스는 신들의 위원회에 이 불의의 현장을 고발했을 것이고, 그녀들은 정의의 판결이 내려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는 일은 없으리라.

상담소에서 나는 페르세포네와 다프네들을 만났다. 그리고 아르테미스 활동가들을 만났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열네 살 적의 피해를 울먹이던 할머니는 강원도 정선에 사는 분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던 당시의 심정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했다. 최근 일어난 성폭력사건을 해결하러 어머니와 함께온 피해자는 어린 시절부터 친부성폭력의 피해자였음이 밝혀졌다. 그 어머니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딸은 성적 일탈로 계속 엇나갔다. 회식 자리에서 상관이 건네준 술을 받아마시고 정신을 잃었고 강간피해가 의심된다는 여자경찰관의 전화도 있었다. 활동가들은 공소시효나 고소기간이 지난 사건에 대해서도, 입증이 어려운 사건에 대해서도 차분히 인내심을 가지고 임했다. 피해자의 얘기를 듣고 요구를 듣고 필요한 지원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가해자와 대면하고 사과받고 처벌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나눴다. 가해자와의 분리를 위한 심정적이고 실제적인 독립의 과정에 동행했다. 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갔을 때도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활동가들은 피해자들의 동반자로서 늘 곁에 있었다.

여성플라자아트홀 봄에서의 일이다. 무대에서는 성폭력생존자말하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이 나를 버렸나, 왜 하필 내게, 고통은 설명할 수도 끝나지도 않아.....’, ‘지금까지 못한 말 이 노래에 담을래, 온전히 나를 드러내고 싶어, 아무일 없던 것처럼 숨기고 싶지는 않아......’. 무대에서 함께 노래하던 소장 이윤상 님이 앞으로 나왔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시니 가슴벅차고 감격스럽습니다. 우리들의 우렁찬 노래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고 합창이 이어졌다. ‘모두를 위해 세상을 위해, 이제는 울지 않고 말할래, 보란 듯 버티고 살아갈래.’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녀들은 내면세계의 안내자로, 승리자의 월계관으로 부활했다. 뜨거운 박수와 응원이 객석에서 터져나왔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감동의 순간을 껴안았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유력일간지 사주의 개인술자리에 수차례 불려나와 성접대라는 명목으로 강간을 당하고 자살한 여성연예인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 대학교수가 학위를 빌미로 제자에게 성행위를 강요하고 성추행했다는 제목이 지면을 장식한다. 검사들이 관행적으로 스폰서 기업으로부터 성상납을 받았으나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모인 특검에서 솜방망이 징계와 무죄 선고를 받는다. 공무원의 편의와 피해자의 부정수급을 막기 위해 여성폭력피해자의 쉼터입소를 전자정보로 전산화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으로 ‘위치를 추적당하는 위기의 여성들’이 있다. 아무래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그 소임을 다하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질 일은 없을 것 같다는 비관적 전망이 든다. 지배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성폭력 문화를 감시하고 반성폭력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한 그녀들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2011년 3월의 봄날,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