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특별법 시행 20년⑧마지막] 성폭력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시행된 지 20년이 흐른 지금, 사회적으로 성폭력 피해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높아졌으나 아직도 성폭력 관련한 범죄는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성폭력특별법 시행 20주년을 맞이하여, 성폭력 사례들을 통해 성폭력에 무감각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점검해보고, 보완이 필요한 법정책에 대해 제언해 보고자 합니다. 본 기사는 "가해자가 성폭력 인정해도 '무죄'...우울한 대한민국" 이라는 제목으로 2014년 9월 26일자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
지난 1994년 제정된 성폭력특별법은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 국가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였다. 성폭력은 피해자가 평생 수치스러워 해야 할 인생의 큰 오점이 아니라 처벌해야 할 범죄 행위라는 우리 사회의 선언인 것이다.
성폭력특별법 제정은 성폭력을 대하는 사회 인식의 대전환 혹은 변화의 분기점이었다. 성폭력특별법 제정 이후 지난 20여년 동안 성폭력과 관련된 많은 제도적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법의 시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법을 보완하기 위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성과를 냈다고 할 수 있다.
▲ 경북경찰청은 성폭력 근절과 피해자 보호 전문화를 위해 '성폭력 전담수사팀'을 신설했다. | |
ⓒ 조정훈 |
가해자가 술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음을 감안해 형을 감경해주던 '음주감경'의 경우를 보자. 여성단체들은 성폭력 가해자들이 음주를 핑계로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수차례 문제제기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2008년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당시 법원은 초등학생 여아를 잔인하게 성폭행한 조두순에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형량을 징역 12년으로 낮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것이 '조두순법'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이 법은 '성폭력범죄의 공소시효를 연장하고, 심신장애 감경 조항을 엄격하게 적용하며, 성폭력 피해자가 미성년자일 경우 피해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 진행이 정지되는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성폭력 피해 당사자의 명예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피해 당사자만 고소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인 '친고죄'도 그렇다. 친고죄는 피해자가 고소할 수 있는 기간이 1년에 불과했고,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하면 없었던 일이 될 수 있는 조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나 가족이 합의를 요구하며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피해자가 합의금을 노리고 고소를 제기한 것으로 몰아가는 등의 피해를 줬다. 이런 이유로 지난 2013년 폐지되었다.
또 피해자가 수사 과정이나 사법 절차 상에서 사생활이나 성 경험과 같은 모욕적인 질문을 받는다든지, 꽃뱀이라는 의심을 받는 등 형사 사법절차 상에서의 2차 피해가 지속적으로 문제되자 이를 막기 위한 대책으로 피해자 국선변호사제도, 증인지원관 제도, 진술조력인제도 등이 도입되었다.
피해자가 상담이나 사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센터나 상담소, 쉼터 등이 확충되었고 피해자와 그 가족의 의료비 지원제도도 마련되었다.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성폭력특별법 제정 이래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책 체계의 큰 틀이 갖추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폭력특별법 20년, 성폭력을 대하는 시선들
그러나 이런 변화의 이면에는, 성범죄 형량이 대폭 강화되면서 판사들의 심리적 부담만 가중시켜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성폭력 범죄에 유죄 판결을 내리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그런가하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잔인한 성범죄에 대한 대중들의 들끓는 여론을 달래기 위한 대응도 적지 않았다. 제도의 효과성이나 사회적 숙의가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은 채 전자발찌, 화학적 거세, 신상정보공개, 유전자정보 집적 등의 제도들도 신속하게 도입되었다.
성폭력 예방과 근절이라는 대의에 찬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의 비용대비 효과성이나 인권침해 논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성폭력 관련 가해자 대책은 인권침해 소지가 있어도 여론의 문제제기가 크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도입되고 다른 범죄자 대책으로도 확장된다.
신상정보 공개 대상을 제도 도입 이전의 범죄자에게까지 소급적용한다거나 전자발찌 착용 대상을 성폭력 범죄자뿐만 아니라 강도범에게까지 확대한 것이 그 예이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보호수용제도 유사하다. 성폭력에 대한 국민 불안이 크니 3범 이상의 성폭력 범죄자나 13세 미만 아동 대상 성폭력범은 형기 종료 후 최대 7년까지 보호수용하겠다는 법을 최근 법무부가 입법예고했다.
인권침해를 이유로 폐지되었던 보호감호제와 유사한 이중처벌 논란이 있는 보호수용제를 도입하겠다는 법무부의 논리는 성폭력이라는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또 다른 인권침해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성폭력특별법은 제정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스무 번도 넘게 개정되었다. 법 개정을 통한 수많은 제도적 변화가 이뤄진 현 시점에서 우리 사회가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해졌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앞서가는 법 제도를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간 성폭력 범죄의 양형이 재판부에 따라 들쭉날쭉이라는 비판이 일자, 법원은 양형을 정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성폭력은 판단하는 사람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 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한공주>의 한 장면. | |
ⓒ 리(里)공동체 영화사 |
강도 피해자에게 왜 밤 늦게 길을 걸었냐, 강도를 당할 수 있는 그런 장소에 간 피해자 책임이 크다, 옷차림이 번드르르하거나 비싼 가방을 들어서 강도의 목표가 될 빌미를 제공했다는 등의 비난을 하지 않는다. 강도에게 돈 뺏길 때 폭행을 당하면서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성폭력은 다르다. 판단하는 사람이 성폭력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성폭력 여부가 달리 보인다.
이 때문에 여전히 어떤 수사팀을 만나느냐, 어떤 재판부를 만나느냐에 따라 성폭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국민참여재판도 마찬가지다.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인 일반 국민들은 성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에 성폭력 사건의 경우 국민참여재판이 그 취지에 무색하게 가해자에게 유리한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이 때문에 성폭력을 규율하는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에 관한 죄를 성적자기결정권에 관한 죄로 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해졌을까
▲ 성폭력범죄에 대한 국민참여재판 진행은 성폭력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 |
ⓒ sxc |
20년 전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될 당시, 성폭력에 관해 규정하고 있던 형법 제32장의 전체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였다. 성폭력이 한 인간이 성적으로 폭력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성이 정조를 잃도록 어떤 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강간죄도 남성이 아닌 부녀자만이 피해자가 되었다.
여성의 정조는 집안이나 배우자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여성 자신에게 속한 의미라고 할 수 없다. 이것 때문에 정조에 관한 죄라는 것은 여성의 성적 의사나 존엄함에 대한 침해와는 매우 다른 의미이다. 이 결과 형법 297조 강간죄는 부녀자가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폭행과 협박을 통하여 성기 삽입을 당한 것으로 규정된다.
정조는 여성이 목숨 걸고 지켜야하는 것인데, 무지막지한 폭력과 협박이 동원되어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강제력이 사용된 경우, 정조를 침해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강제력의 요구는 강간이 아닌 강제추행도 마찬가지다. 여성은 죽을 때까지 저항해야만 강간이 인정되고 성추행이 인정되는 식이다.
2012년의 성폭력 처벌법 개정으로 남성도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남성 강간 피해자가 겪는 항문성교나 구강성교 등은 강간보다 형량이 낮은 유사성교행위로 처벌받게 된다. 여전히 여성의 성기에 남성의 성기가 삽입된 성폭력 범죄를 가장 심각한 범죄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적자기결정권은 남성과 여성 모두가 가진 권리이고, 이러한 권리를 침해당한 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문제이다. 또한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 혹은 피해자가 될 자격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다. 형법과 성폭력 관련법이 지향하고 있는 근본적 인식의 틀을 바꿔야 한다.
작년 상관의 폭언과 성폭력과 같은 인권침해를 견디다 못한 여군 대위가 자살한 사건은 가해자의 파렴치한 성폭력이 피해자를 죽음으로까지 내몰았지만 1심 재판부의 형량은 고작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이었다. 운전병이었던 피해자를 강제추행했던 해병대 성폭력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성폭력 사실을 인정하는 진술을 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데이트 관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의 경우, '연애하는 사이에서 무슨 성폭력?'이라는 등의 관념으로 수사 과정을 통과해 기소하기조차 어렵다. 정부가 성폭력 근절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내세우는 것과 별개로 형사사법절차에서 피해자가 성폭력피해를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성폭력 특별법이 시행된 지 20년이 흘렀지만, 성폭력 근절을 향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고,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더 많은 얘기들을 해야 할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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